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625 사변 기념일이라는 날짜에 상응하여,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화해'를 주제로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형제의 죄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곧, 한계 없이) 용서하라고 매우 강력한 어조로 지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안일한 시선입니다. 그 누구도 남에게 용서를 지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용서를 지시하는 것이야말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마치 죄인처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합니다. 용서를 하지 않는 피해자가 왜 죄인입니까? 게다가 오늘은 625 사변 기념일이며, 이 전쟁의 책임은 양비론으로 희석할 수 없습니다. 더 일반화해서, 역사 속에는 양비론으로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아픔들이 있습니다. 우리와 일본의 과거사를 예로 들 수 있지요.
우리는 이 반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시민윤리적으로 보자면 위 반론에 더이상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산상설교를 비롯한 복음서 속 계명들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에게, 곧 '종말론적 이스라엘'인 '교회'에게 주워진 것이다. 곧, 구약의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계명들 역시도 온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동등하게 입법된 게 아니라, 우선 이스라엘에게 입법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교회)이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되면, 온 세상의 인류가 시온(=교회)을 순례할 것이다.(이사 2,2-5; 미카 4,1-5) 그렇기에 마태 5,14는 이사야-미카의 만민 시온 순례를 의식하여 교회를 '산 위의 폴리스'라 부르는 것이다.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οὐ δύναται πόλις κρυβῆναι ἐπάνω ὄρους κειμένη
(hymeis este to phōs tou kosmou. ou dynatai polis krybēnai epanō orous keimenē)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polis)은 감추어질 수 없다.
-마태 5,14
특히나 복음서 구절 중에서도 오늘의 복음 말씀이 들어있는 마태오 18장은, 특히나 교회론적 뉘앙스가 매우 강한 문맥이다. 두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엔 그리스도께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은 명백한 교회론적 말씀이며, 따라서 일흔일곱 번의 용서도 교회 내부의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는 교회 바깥 사람을 용서하지 말란 의미가 아니다. 용서의 연쇄, 곧 화해의 연쇄가 시작되는 명백한 장소가 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 장소를 우리는 이스라엘(=교회)이라 부른다.
제2독서 역시도, 역시나 교회 내부의 화해를 다룬다는 점에서 복음 말씀과 명백히 상응한다. 돌이켜보건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무죄한 이들의 무균실로 상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죄인들이 서로 화해하는 공동체로 보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신앙인의 화해'를 다루는 제1독서로 넘어갈 수 있다. 복음 말씀과 제2독서에서 다룬 '신앙인끼리의 화해'가 '하느님과 신앙인의 화해'에 신비(mystērion)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다. 어떻게 상응할까?
복음 말씀(마태 18.19ㄴ-22) 다음에 오는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에서 이를 해설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의 기도'에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했듯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소서"(마태 6,12 / 200주년 신약)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되돌아와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 이야기를 하자면, 처음에 언급했듯이 시민윤리적으로 말하자면 여기 더 할말이 없다. 그러나 교회는 우선 형제자매끼리 화해해야 하고, 그 화해를 시작으로 교회 바깥에 연쇄를 일으켜야 한다. 교회는 단지 시민윤리를 솔선수범하는 기관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만약 가톨릭 신자 유무가 화해와 용서의 문제에서 그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건 뭔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1
메시아께서 정녕 이 세상에 오셨다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상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초기 교부들은 결코 이 변화가 죽음 이후에야, 혹은 연대기적으로 까마득한 미래에야 시작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말 메시아가 오심으로서 뭔가가 변했으니, 교회 안에서 민족들의 화해가 실천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교부들은 확신하였다. 아무 부담 없이 먼 미래 세대로(혹은 죽음 이후로) 화해의 계명을 던져버리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21세기의 한국 교회도 화해의 계명을 준수해야 함은 물론이다.
실천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당연히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에 동의하란 의미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희석하란 의미도 아니다. 정치인과 군인의 직업적 소명 의식에 딴지를 걸고 싶은 것도 아니다.(그래서도 안된다.) 다만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면, '화해'라는 문제에 대해 뭔가가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가 달라야 한다. 비단 대북관계나 외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최우선적으로는 교회안에서, 교회를 구심점으로 삼아 세상을 향해서, 뭔가가 달라야 한다.
- 하느님의 나라(Basileia, 다스림)는 내세까지 미루어졌다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느님의 바실레이아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 바실레이아에 살아서 편입되어야 한다.물론 이 바실레이아는 '나'의 죽음으로 끝장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완전하게 도래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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