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독서&복음 묵상

[20231029 가해] 연중 제30주일

틀니우스키케로 2023. 10. 30. 00:41

제1독서

<너희가 과부와 고아를 억누른다면 나는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22,20-2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0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21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22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23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24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25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26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1,5ㄴ-10
형제 여러분, 5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6 또한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울려 퍼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구약(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모든 정신은 마태 22,37-39에 다 있다. 신학에선 이를 '사랑의 이중계명'이라 부른다. 물론 이는 이중계명 빼고 구약 모든 구절을 무시해버리란 소리가 절대로 아니다. 이중계명에 비추어서 구약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둘째도 이와 같다"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연결시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웃을 사랑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시 가능하다는 것일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둘은 동일시될 수 없다. 하느님과 인간이 같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같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복음서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난 이렇게 생각한다. 둘은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가리키는 일종의 '성사'이다.[각주:1] 즉 '이웃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자리라는 말이다. 불우한 이웃에게 가톨릭 신앙에 입각하여 적선을 한다면, 이는 하느님 사랑이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성사가 된다. 주는 사람 입장에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게 드러나는 성사이고, 받는 사람 입장에선 '하느님께 사랑받는다'는 게 드러나는 성사이다. 신앙이 없는 제3자가 본다면 이는 신앙과 별 상관이 없어보일 것이다. 비신자의 눈엔 세례성사가 그냥 물붓기이고, 성체가 그냥 빵이고, 고해성사가 고작 심리상담이듯이.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물붓기는 실제로 일어나는 '죄 씻음'을 상징하고, 빵의 형상은 이 형상 속에 정말로 있는 그리스도의 실체를 상징하고, 사제의 용서는 실제로 일어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상징한다.

 

결국 '사랑의 이중계명'은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을 상징하게 하라는 요구가 아닐까?

 

 

 

 

 

 

 

 

  1. 본래 '성사'(희랍어-mystērion; 라틴어-sacramentum)라는 말은 실재(res)를 가리키는 '상징'을 의미한다. 가령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하지만, 빵과 포도주의 형상(species)은 그대로 남아서 몸과 피의 실체를 상징한다. 여기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species)은 성사 자체(sacramentum trantum)이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형상'이 상징하는 실재(res)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