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너희가 과부와 고아를 억누른다면 나는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제2독서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구약(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모든 정신은 마태 22,37-39에 다 있다. 신학에선 이를 '사랑의 이중계명'이라 부른다. 물론 이는 이중계명 빼고 구약 모든 구절을 무시해버리란 소리가 절대로 아니다. 이중계명에 비추어서 구약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둘째도 이와 같다"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연결시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웃을 사랑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시 가능하다는 것일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둘은 동일시될 수 없다. 하느님과 인간이 같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같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복음서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난 이렇게 생각한다. 둘은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가리키는 일종의 '성사'이다. 즉 '이웃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자리라는 말이다. 불우한 이웃에게 가톨릭 신앙에 입각하여 적선을 한다면, 이는 하느님 사랑이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성사가 된다. 주는 사람 입장에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게 드러나는 성사이고, 받는 사람 입장에선 '하느님께 사랑받는다'는 게 드러나는 성사이다. 신앙이 없는 제3자가 본다면 이는 신앙과 별 상관이 없어보일 것이다. 비신자의 눈엔 세례성사가 그냥 물붓기이고, 성체가 그냥 빵이고, 고해성사가 고작 심리상담이듯이.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물붓기는 실제로 일어나는 '죄 씻음'을 상징하고, 빵의 형상은 이 형상 속에 정말로 있는 그리스도의 실체를 상징하고, 사제의 용서는 실제로 일어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상징한다. 1
결국 '사랑의 이중계명'은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을 상징하게 하라는 요구가 아닐까?
- 본래 '성사'(희랍어-mystērion; 라틴어-sacramentum)라는 말은 실재(res)를 가리키는 '상징'을 의미한다. 가령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하지만, 빵과 포도주의 형상(species)은 그대로 남아서 몸과 피의 실체를 상징한다. 여기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species)은 성사 자체(sacramentum trantum)이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형상'이 상징하는 실재(res)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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