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제2독서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복음 말씀에서는, 표면상으로는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과 고용 계약을 맺고 임금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이것은 일반적인 고용 계약이 아니다. 고용 계약은 "일했으니까 대가를 지불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 포도밭 주인은 1데나리온을 주고 싶으니까 그것을 줄 구실을 찾고 있을 뿐이다. 이 복음 말씀에서 포도밭에 대한 주인의 관심은 부차적인 것에 머물고 있다. 오히려 진짜 관심은 1데나리온을 어떻게든 주고 말겠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늦게 왔는데 왜 1데나리온을 받냐는 항의는, 이 괴짜 지주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온 것이다. 만약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을 가꾸고 싶으니까' 일꾼을 고용한 것이라면, 포도밭 경작에 기여한 노동의 가치만큼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당시의 일꾼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마지막에 온 사람에겐 1데나리온에 한참 못 미치는 대가를 줘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의 제1관심사는 포도밭이 아니라 일꾼이다. 그래서 일단 임금을 지불할 구실만 있으면, 너도나도 1데나리온씩 받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은총'과 '공로'에 대한 골치아픈 신학적 난제가 풀리는 것을 본다. 1데나리온을 주고 싶은 괴짜 지주가 고용 계약의 형태를 구실로 삼았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공로'를 구실로 삼길 원하신다. 그러나 지주의 이 기행이 사실은 고용 계약이 아니듯이, 성화 은총을 받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공로가 있으니 대가를 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성화 은총을 주고 싶으니까 유비적 의미에서의 '공로'를 구실로 삼은 것 뿐이다.
늦게 장터에 나온 사람이 더 게으를 수는 있다. 하지만 마누라의 등쌀 때문이건 양심의 가책 때문이건, 아무튼 결국에는 늦게라도 장터에 나왔다. 그리고 일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괴짜 지주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계속 강조되지만, 이 비유에서 '은총의 무상성'은 전제된다. 일꾼들이 1데나리온을 받은 이유는 포도밭 주인의 호의 때문이다. 포도밭 주인이 애초에 일꾼을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니 1데나리온을 받은 것이다. 만약 포도밭 주인에게 '포도밭'이 제1목표였다면, 대등한 고용 계약일 뿐 선물도 무엇도 아니다. 고용주와 일꾼은 원칙적으론 대등한 계약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포도밭은 '아무래도 좋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된다. 고용주가 원하는 것을 해줬으니 일꾼이 원하는 것을 받는다는 '고용 계약의 기본 원리'가 여기선 성립하지 않는다. '고용 계약' 비슷한 모습을 한 기행일 뿐이다. 이 괴짜 지주는 그저 1데나리온씩 뿌리고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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