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2 가해] 연중 제13주일
제1독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2독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복음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오늘의 복음에선,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라는 독특한 화법이 사용된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그리스도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의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의인처럼 된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악인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악인처럼 될 것이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느님처럼 되"(창세 3,5)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악과를 먹으라 유혹하지만, 사실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다. 그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이를 신화(神化, Θέωσις) 1 내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라고 한다.
복음서는 이러한 신화(神化)를 이뤄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십자가를 제시한다. 물론 이는 고통 그 자체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마조히스트적 사랑이지, 그리스도교적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그 자체는 피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고통 그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의 고통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다스림(바실레이아)과 교회(종말론적 이스라엘)를 선포하셨지만, 그를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통도 감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이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부활의 영광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한 것이다.
아무튼 위대한 사랑엔 고통의 감당과 희생, 자기헌신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매우 달콤한 감정의 상태로 생각하지만, 이 사랑은 희생과 자기헌신이 전제되어야 위대해진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떤 노신사에게 치매에 걸린 부인이 있다. 그리고 노신사는 매우 헌신적으로 부인을 돌보고 있다. 이 부인에게는 더이상 젊은 시절의 매력이 남아있지 않고, 솔직히 가끔은 노신사도 부인을 돌보는 게 귀찮고 짜증이 날 것이다. 빈말로라도 달콤하지 않다. 그러나 이 노신사에겐 틀림 없이 사랑이, 그것도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물론 부인의 치매 자체는 피해야 마땅한 재앙이지만, 이왕 이 재앙이 닥쳤을 때 자기헌신을 하였기에, 노신사가 가진 위대한 사랑이 드러난 것이다. 아름다운 남녀가 서로에게서 느끼는 즉흥적인 감정의 격류보다 이 사랑이 더 위대하다는 데 과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 Theōsis(테오시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