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독서&복음 묵상

[20230702 가해] 연중 제13주일

틀니우스키케로 2023. 7. 2. 13:43

제1독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4,8-11.14-16ㄴ
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한 부유한 여자가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
9 그 여자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10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하나 꾸미고,
침상과 식탁과 의자와 등잔을 놓아 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11 어느 날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옥상 방에 들어 쉬게 되었다.
14 엘리사는 종에게 “저 부인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하고 물었다.
게하지가 “저 부인은 아들이 없는 데다가
남편은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엘리사는 “여자를 불러라.” 하고 일렀다.
종이 여자를 부르니 그 여자가 문간에 섰다.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6,3-4.8-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7-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선,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라는 독특한 화법이 사용된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그리스도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의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의인처럼 된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악인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악인처럼 될 것이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느님처럼 되"(창세 3,5)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악과를 먹으라 유혹하지만, 사실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다. 그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이를 신화(神化, Θέωσις[각주:1]) 내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라고 한다.

 

복음서는 이러한 신화(神化)를 이뤄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십자가를 제시한다. 물론 이는 고통 그 자체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마조히스트적 사랑이지, 그리스도교적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그 자체는 피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고통 그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의 고통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다스림(바실레이아)과 교회(종말론적 이스라엘)를 선포하셨지만, 그를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통도 감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이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부활의 영광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한 것이다.

 

아무튼 위대한 사랑엔 고통의 감당과 희생, 자기헌신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매우 달콤한 감정의 상태로 생각하지만, 이 사랑은 희생과 자기헌신이 전제되어야 위대해진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떤 노신사에게 치매에 걸린 부인이 있다. 그리고 노신사는 매우 헌신적으로 부인을 돌보고 있다. 이 부인에게는 더이상 젊은 시절의 매력이 남아있지 않고, 솔직히 가끔은 노신사도 부인을 돌보는 게 귀찮고 짜증이 날 것이다. 빈말로라도 달콤하지 않다. 그러나 이 노신사에겐 틀림 없이 사랑이, 그것도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물론 부인의 치매 자체는 피해야 마땅한 재앙이지만, 이왕 이 재앙이 닥쳤을 때 자기헌신을 하였기에, 노신사가 가진 위대한 사랑이 드러난 것이다. 아름다운 남녀가 서로에게서 느끼는 즉흥적인 감정의 격류보다 이 사랑이 더 위대하다는 데 과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1. Theōsis(테오시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