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6 가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제1독서
<너희 나의 양 떼야. 나 이제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전근대에 왕의 신민들은 현대보다 훨씬 '개인화'된 국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학자 Jean-Louis Ska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대 세계에서 ... 한 개인과 그가 속한 사회 공동체 간의 대립과 갈등 역시 현대의 세상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 자체가 이미 훨씬 '개인화'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인이나 개별 부족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한 왕국에서, 임금은 왕국의 일치를 이룬 사람이자, 또한 일치를 보장해주는 존재였다. 반면, 왕국을 이루고 있던 백성들은 서로 다른 민족들에 속할 수 있었고 또 그들 각자의 문화 역시 큰 차이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은 모두 다 자신이 속한 왕국의 임금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나라'나 '국가'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련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한 임금이 존재하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루이 14세의 유명한 문장은 단지 태양왕으로 불린 그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 세계의 통치 제도 하에 만연해 있던 임금과 왕국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은 대부분 한 명의 임금이나 군주 또는 조상과 갖게 되는 개인적인 결속 관계를 의미했다. 물론 가족이나 부족, 종족, 더 나아가 민족과 같은 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조차 그 집단의 서로 다른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 고리는 제도적인 차원이 어니라, 훨씬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Jean-Louis Ska, 《잉크 한 반울: 성경이 제시하는 전망들에 대한 고찰(UNA GOCCIA D'INCHIOSTO: Finestere sul Panorama Biblico》, 박문수 번역, 성서와함께, 2021, p.235
우리는 이 표상을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당연히 수많은 행정기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와 비슷하지만,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국가 개념과 동일시하는 건 비역사적인 인식이다.(예수님은 1세기에 활동하신 유다인이시다.) 어쩌면 '모든 백성을 하나로 묶은 유일한 한 임금'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단 하나의 천자(天子)인 그리스도와 갖게 되는 개인적인 결속 관계를 의미한다. 물론 이것이 현대의 개인주의적 신심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며, 성경은 명백히 공동체적인 표상들(예루살렘, 도시, 백성 등)을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공동체성들은 단 한 분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에 기반한 것이다.
최초로 저술된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직역되는 헤드라인(1장 1절)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
[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에우앙겔리온의 시작
당시에 에우앙겔리온(복음)은 정치적으로는 군주의 탄생이나 즉위에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신의 아들'은 로마 황제를 수식하는 말이었다. 또한 마르코 복음서는 AD 70년 전후에 저술되었는데, 그때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아들 티투스를 시켜서 예루살렘을 파괴한 때(AD 70)였다. 1
다시 말해서, 마르코 복음서 저술 당시 로마제국에는 '에우앙겔리온'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하신 분, 흔히 '황제'로 의역됨) 즉위라는 '에우앙겔리온'이 울려퍼졌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에우앙겔리온'이 울려퍼졌다.
바로 그 때, 전혀 새로운 '에우앙겔리온'을 담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의 '에우앙겔리온'은 짓밟고 파괴하여 선포된 '에우앙겔리온'이었고, 그 목표는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나자렛 예수의 '에우앙겔리온'은 일으키고 치료하여 선포된 '에우앙겔리온'이었다. 복음사가는 바로 이 사람을 세상의 유일한 천자(天子)이자 진정한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고 확신하며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
[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에우앙겔리온의 시작
- AD 66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유다인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시작한다. 중간에 그는 '황제'로 추대되고 아들인 티투스가 봉기 진압을 인수인계한다. AD 70년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훗날(AD 79) 황제에 오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