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은 교황 혼자 밀어붙인 게 아니다
틀니우스키케로
2023. 6. 25. 02:12
두 교의가 교황 무류성으로 선포된 거다 보니, 마치 남들이 반대하는데 교황이 밀어붙여서 통과시킨 거 같은 이상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이 선포된 역사적 맥락을 보면, 오히려 교황들은 매우 신중하게 유보적인 입장이었고, 오히려 소위 말하는 '교회의 하부 구조'에서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와서 교의로 선포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물론 이걸 모든 가톨릭 신자의 개개인의 예외 없는 만장일치라 하긴 어렵겠지만, 당시 정황을 보면 '일치된 의견'이라 하기엔 무리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아래는 무염시태 선포 당시의 상황이다.
1884년 10명의 프랑스 대주교들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공동 서한을 보내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선포해 주기를 요청한다. 또한 1843년에는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인 람브루스키니(Luigi Lamburschini, 十 1854) 추기경이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에 유리한 성서 구절, 전승, 교황청 문헌들을 다수 수집하여 논문을 발간하였고, 이 책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반대하던 도미니코회원들도 성모 신심 미사의 감사송에 “원죄 없는”(immaculata)이란 표현을 삽입하려고 노력하였다.
... 교황 비오 9세는 1852년 20명의 신학자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검토하게 하였다. 여기서 교의 결정의 근거로 삼을 만한 기준들이 논의되었는데, 당시 주교단의 일치된 의견과 교회의 전례 실천도 교의 결정을 위한 긍정적인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1854년 3월 22일 21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소집되어 회칙의 제4차 초안이 검토되었다. 같은 해 12월 2일 교황은 회칙의 최종 편집을 추기경단에 넘겨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 낸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이 발표되어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가 교의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 『주님의 어머니 신앙인의 어머니 – 어제와 오늘의 성모 마리아』, 서울가톨릭대학출판부, 2014, pp.171-173
그리고 이건 몽소승천 선포 당시의 상황이다:
많은 주교, 신부들, 그리고 신자들은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할 것을 지속적으로 청원하였다. 교황 비오 10세(Pius X, 十 1914)는 계속되는 청원에 대해 교의 선포 이전에 진지하고도 많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1863년부터 1920년까지 19개 국가에서 1,615,000명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교황청에 성모 승천의 교의 선포를 청원하였고, 1921년부터 1940년 사이에 청원자 숫자는 6,471,000명으로 늘어났다. 청원자들이 내세운 근거는 다양했다. 일부는 성모 승천이 성경에 증언된 분명한 계시 진리임을 내세웠고, 다른 이들은 성모 승천을 사도들로부터 현재의 교회까지 끊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 온 구전 사도전승으로 간주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모 승천이 현재 교회의 일치된 신앙이라는 점을 근거로 교의 결정을 요청하였다.
...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교의 선포 청원이 줄을 이었다. 로마는 더 이상 유보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하기 위해 어느 교황들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우선 1869년부터 1940년까지 3018건의 청원을 분석하게 하고, 그 결과 96%가 성모 승천의 교의 선포를 염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또한 교황은 교황 비오 9세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해 주교들, 신학자들, 신자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추기경단에게 의견을 묻고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 낸다. 마침내 교황은 1950년 11월 1일에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다.
같은 책, pp.175-178
그래서 성공회와의 일치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54년과 1950년에 선포한 것은 어떤 논쟁에 대한 대응으로 내려진 것이 아니라,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모든 신자의 신앙에 대한 일치된 의견을 반영한 것입니다.(The definitions of 1854 and 1950 were not made in response to controversy, but gave voice to the consensus of faith among believers in communion with the Bishop of Rome.)
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 위원회(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희망이신 마리아〉(Mary: Grace and Hope in Christ), 2005년, 제62항 1
- 원문은 https://www.anglicancommunion.org/media/105263/mary-grace-and-hope-in-christ_english.pdf 에서 볼 수 있고, 한국어 번역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일치문헌》 제2권, 2009'에서 발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