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3 가해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
제2독서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복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자면 매우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예언의 내용부터가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매국노로 오해 받기 쉬운 소명을 수행해야 했다. 예레미야서 28장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 하난야 역시도, 단순한 사기꾼이라기보다는 나름대로 자기 확신에 차서 에레미야를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예레미야 당사자 역시도 주님께 하소연을 한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예레 20,7)
예수님 역시도 인간적으로 보자면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사셨다. 더군다나 최고의회의 판결로 처형된다는 것은, 당시 유다인들의 눈에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징벌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매우 저주스러운 죽음이었다. 베드로가 십자가 예고에서 펄쩍 뛰고 반발한 것도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상설교에서는 이러한 고통의 삶을 "행복"하다고 말한다. 유사하게, 윤동주 시인의 시 《십자가》에서는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라는 언뜻 모순되어보이면서도 매우 그리스도교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도대체 이러한 삶을 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지의 열쇠를 오늘의 제2독서가 제공해준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고통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례적으로 하느님께 제물로서 봉헌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만 보면 당연히 피해야 하고 무의미한 것이지만, 이러한 봉헌을 통해서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될 수 있다.
성찬례는 우리의 고통을 희생 제사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겪으신 것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대속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가 당신께서 이루신 일에 참여케 하는 신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구원의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고통을 겪고 돌아가셨다. ... 구원을 가져다주는 고난은 우리의 위대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다. 성령의 힘에 의해 우리의 고통은 사랑을 정화한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겪는 고통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살아 있는 제뮬은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당신의 방식을 취하시도록 이끈다.
스콧 한(Scott Hahn), 『네 번째 잔의 비밀』(The Fourth Cup), 가톨릭출판사, 2023, pp.206-209.
그렇기에 교회는, 인간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으신 분들께도 복자(福者, Beatus), 곧 '행복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드린다.
이것이 다른 종교들과는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의 특별함이다. 많은 종교들은, 간단한 기복신앙이든, 혹은 해탈을 추구하는 묵상이든 간에, 고통을 피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고통 그 자체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를 온전히 인정하면서도, 그 고통을 감수하고 봉헌할 때 일어나는 긍정적인 성격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봉헌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전환'을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에서는 설화적으로 다음과 같이 멋지게 설명한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50,20)